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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metric Echoes〉 작가노트

최혜경, 2025

정지된 화면에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모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화면 위에 쏟은 시간도,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그림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던 몸짓도, 이미지에 불어넣은 소망도—결국은 회화의 화면 위에서 건조된 물감으로 ‘결정화(crystallize)’되기에 실제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화의 화면은 단지 정지된 상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전시 〈Geometric Echoes〉는 내면과 세계가 지닌 유동성을 회화적 공간으로 해석하며, 화면 속에 멈춰있는 공간이 보는 이의 지각 속에서 다시 흐르게 될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러한 탐구에서 기하학은 유동하는 관계들 사이에서 가로지르며, 관계와 흐름을 발생시키는 실천적 도구로 작동한다. 이때 기하학은 보편적 질서와 절대적 법칙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을 연결하고 그 만남이 생성하는 유동적 공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매개체에 가깝다. 나는 이를 ‘수행적 기하학(performative geometry)’이라 부르며, 이를 통해 세계를 연결과 생성, 변화와 흐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시는 부딪히는 순간마다 공명하는 메아리처럼 끊임없이 새롭게 재탄생하는 세계를 형상화한다. 질감, 그림자, 깊이감, 물감의 물성 등 회화 고유의 요소를 활용하여 이 유동하는 세계에 자명한 존재감을 부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시적 영역에서 쉽게 간과될 수 있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세계가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서 현실로 드러나길 희망한다.

〈분사된 궤도 Sprayed Orbits〉는 이러한 개념을 구체화한 작업이다. 원과 사각형 종이를 말아 원뿔과 원기둥을 만든 뒤, 이를 바닥에 눕힌 캔버스 위에 세워 그 안팎에 물감을 분사하여 제작했다. 종이를 휘는 정도를 달리하며 캔버스와 구조물이 맞닿는 경계에 물감의 자국을 남기고, 곡선들 사이 공간의 색을 변화시켰다. 이렇게 삼차원 구조물을 이차원 평면에 사영하는 과정을 거치며, 원이나 사각형 같은 단일한 기하학적 형상이 무한히 변화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골격을 지닌 신체 부위가 몇 개의 관절이 결정하는 직선적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달리, 심장·자궁·위처럼 연질의 기관은 각 세포가 움직임에 관여하며 곡선적 운동을 만들어낸다. 〈분사된 궤도〉는 이러한 곡선적인 움직임을 떠올리게 하는 유연하고 휘어진 공간을 구현한다. 작업 과정에서 공간이 수축하고 팽창할 때 변하는 공기의 밀도·압력·농도를 상상하며 물감을 분사했고, 인접한 공간의 물리적 성질 차이가 물질이 경계를 넘어 흐르고 섞이게 한다는 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물감의 다양한 색점을 시각적으로 혼합하는 효과를 통해, 경계를 흐리게 하고 파스텔 색조를 형성하였다. 또한, 물감 방울을 겹겹이 쌓아 거친 질감을 드러냄으로써 시각적으로 불분명해 보이지만 촉각적으로는 분명한, 유동하는 공간의 존재감을 구현하고자 했다. 

전시 〈Geometric Echoes〉는 차원의 전환, 곡선적 구성, 물감을 분사하는 기법, 그리고 생물학적 은유 등을 통해 유동하는 공간을 회화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공간은 단일하게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형상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나는 이러한 미완의 상태에서 유한과 무한, 정태와 동태, 시각과 촉각, 투명함과 불투명함을 오가며 존재와 세계를 연결하고 생성하는 ‘전환의 힘(transformative power)’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힘이 작동하는 장소로서 회화의 화면을 활성화하고자 한다. 이 전시를 통해 결정화된 이미지가 보는 이의 지각 속에서 다시금 진동하며, 새로운 시간과 운동을 얻어 살아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