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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의 쓸모

전은선

최혜경의 화면은 대체로 기하학적이다. 회화의 공간은 x축과 y축이 이루는 좌표 평면, 또는 여기에 z축이 더해진 좌표 공간처럼 구조화되고, 마름모나 원 같은 평면 도형, 정육면체나 구체 같은 입체 도형이 그 공간 안에 놓인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의 화면은 장식적 요소로 가득하다. 〈Aether series〉(2022-23)에서는 바둑판 무늬, 물방울 무늬, 대리석 무늬처럼 일상에서 장식을 위해 자주 쓰이는 무늬들이 보이고, 〈Study of intra-terior〉(2023)에서는 가정집의 레이스 커튼을 연상시키는 꽃무늬가 눈에 띈다. 〈Opposite of F〉(2024)에서는 특정 건축물의 기둥 장식이나 도자기의 그림, 타일의 문양이 그대로 투영된다. 〈Weaver〉(2023)와 〈Aether series_Sphere〉(2022), 〈Aether series_Votex〉(2022)에서는 은박 또는 금박으로 보이는 여러 단편이 나타나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모든 장식적 요소가 장식의 본래적 기능, 즉 ‘꾸미기’에서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작가의 화면에서 장식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가?

최혜경은 장식이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키고 취향을 드러내며 환상을 반영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번 전시 《Opposite of F》에서 ‘F’는 바로 ‘환상(Fantasy)’을 의미하며, 작가는 이것이 장식의 대표적인 속성이라고 본다. 그런데 ‘F’는 또 다른 의미로 ‘평면성(Flatness)’을 암시하기도 한다. 평면성은 모더니즘 시기에 회화 고유의 매체가 지닌 배타적 속성으로 여겨진 것이다. 평면성은 캔버스의 프레임과 올의 짜임이 이루는 수직과 수평, 그리고 이 둘이 직교하여 만들어내는 격자 구조인 ‘그리드(grid)’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화면의 모든 곳이 균등한 무게를 지니는 그리드를 의식할 때 평면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기하학적 추상 회화는 그리드를 좌표 평면으로 삼아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평면성을 은폐하는 3차원 환영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또한 본질적인 것만 남기기 위해 순수한 조형 요소 외의 잉여적인 것은 배제하였다. 그리드를 의식적으로 그리는 최혜경의 화면은 기하학적 추상 회화와 일견 유사해 보이지만, 작가는 그리드를 전복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그것이 지닌 폐쇄성을 누설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모더니즘의 그리드는 회화의 관심을 매체 내부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Opposite of F》에서 작가는 그리드를 3차원 구조로 확장함으로써 입체적인 공간감을 화면에 다시 들여오고,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장식적 요소를 그리드와 결부한다. 

장식은 그리드에 대한 최혜경의 양가적인 관점을 드러내는 데 특히 효과적인 장치다. 그의 작업에서 장식은 견고하지만 폐쇄적인 그리드에 균열을 내기 위해 줄곧 도입되어 왔다. 《가능세계》(2018)에서는 자기 지시적인 그리드의 평면에서 누락된 생생한 감각을 되찾기 위해 상태가 유동적으로 전환되는 휘발의 순간을 시각화하며 장식적 요소를 활용하였다. 〈7XSECRETS〉(2019)에서는 그리드를 여성적 감각으로 치장하는 행위, 일명 ‘다이어리 꾸미기’에서 소녀들의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환상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서 장식에 주목하였다. 《이온러브》(2020)에 이르러 캔버스는 망사로 변모하고, 그럼으로써 미세한 입자인 이온이 드나드는 피부처럼 얇은 막으로 기능하는 회화의 표면을 형상화하였다. 물감은 프레임도 없이 공간에 걸려있는 망사 천에 안착하여 장식의 감각적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장식이 그리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이유는 둘의 차등적 위치 때문이다. 최혜경은 회화와 장식, 곧 순수예술과 장식예술이 동일한 조형적 동기를 지니지만 둘 사이에 위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이용한다. 똑같이 점, 선, 면을 기초로 하지만, 장식은 이 요소들이 자기 유사적으로 반복되며 패턴을 만들어내는 반면, 회화는 이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을 이루거나 유의미한 구성을 만들어낸다. 순수예술의 암묵적인 전제는 회화가 (원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마티스의 작품처럼) ‘장식적’으로 될 수는 있지만, 장식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폴록의 전면 회화가 아무리 벽지 패턴에 가까워진다고 하더라도, 회화와 벽지 사이에는 아득한 심연이 놓여있다. 반면 장식은 ‘예술적’으로 될 수는 있지만 언제나 예술보다는 사물에 더 가깝다. 

최혜경의 작업에서도 장식의 위상은 이와 같았고, 〈7XSECRETS〉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장식의 쓸모는 단연 ‘꾸미기’에 있었다. 여기서 장식은 그리드로 상징되는 권위적인 순수예술의 전통에서 도외시되었던, 여성적 감각이나 환상적 요소를 기입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Opposite of F》에서는 장식이 그리드를 치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드와 장식의 관계는 불편하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 친밀하며, 둘은 동반자로서 함께 회화의 공간을 구조화한다. 〈Aether series_term Ⅵ〉(2023)에서 그리드는 2차원과 3차원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공간을 유동적으로 구획하고 좌표상 임의의 점들을 연결하여 닫힌 형태의 도형을 그려낸다. 무늬는 그리드와 도형의 표면을 장식하는 부가물이 아니라 표면 자체의 질감이 된다. 〈Study of intra-terior〉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리드에 기반하여 그려진 기하학적 형태와 그것의 표면이 드러내는 다양한 무늬는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그리드의 격자 구조와 장식적 격자 무늬가 구별될 수 없게 중첩됨에 따라 장식의 위상은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는 장식을 화면에 들여오는 방식에 기인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장식을 위해 사용되는 다양한 재료를 수집하고, 실크스크린 등의 판화 작업을 통해 재료의 표면이 지닌 질감을 화면에 찍어낸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무늬는 재료의 표면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재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꽃무늬가 레이스 커튼을 연상시키기는 해도 그 기원을 특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현실 속 사물의 흔적으로서 그리드와 도형에 새겨진 무늬는 결국 기본적인 조형 요소로 환원되어 추상성을 띠게 된다. 건축물의 장식이나, 도자기의 그림, 타일의 문양이 그대로 투영되는 〈Opposite of F〉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원을 특정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은 일종의 속임수다. 실재하는 건축물의 기둥 장식이나 바닥 타일의 문양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생성형 AI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낸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반면 세계의 원형으로 추상되었던 도형은 작가의 화면 속에서 물리적인 대상으로 재현된다. 〈Aether series〉에서 도형은 ‘아이테르(aether)’라는 원소(가상의 물질로 밝혀졌지만, 한때 천체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자 빛의 매질로 상정되었던 것)에 유비되거나 이것에 의해 매개되고 상호작용하는 서로 다른 존재들로 그려진다. 도형, 특히 구체는 물리 법칙의 영향을 받는 현실의 사물처럼 찌그러지고 터지거나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존재들 사이의 역동적인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형태를 비정형적으로 흩트리고 물감이 번지거나 흐르도록 하는 우연적인 기법에 많이 의존한다. 결과적으로 그리드에 새겨진 무늬가 불러일으키는 촉각적 감각은 화면 안에서 맴도는 한편, 구체는 명석한 수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물성을 표면에 결박하며 훨씬 더 강력한 촉감을 느끼게 한다. 

결국 최혜경의 화면에서 장식의 쓸모는 장식이기를 단념하는 곳에서 발견된다. 장식과 회화는 그들이 동기를 공유하는 지점에서 만난다. 사물의 표면을 무늬로 찍어내는 것도, 기하학적 좌표를 이어 도형을 그리는 것도 모두 작가의 의식을 반영하고 환상을 투영하는 행위이자 시간의 흔적을 쌓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두 ‘F’는 반대될지언정 분리될 수는 없다. 둘은 씨실과 날실이 되어 하나의 직물로 짜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