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세계가 사라지고, 다시 떴을 때 새로 태어난다.
I shut my eyes and all the world drops dead,
I lift my lids and all is born again
– Sylvia Plath , 「Mad Girl’s Love Song」에서
굳건하다고 믿었던 관계, 감정, 의지, 정체성, 신념이 불현듯 떠나고, 무의미라는 진공이 주변을 에워싼다. 세계는 마치 휘발성을 지닌 물질처럼 증발했다가 다시 응결하고, 부풀었다가 수축하며, 머물렀다가 흘러간다. 이러한 세계의 변덕에 불안과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세계가 변치 않고 이해할 수 있는 뚜렷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기대 때문인지도 모른다.
뚜렷한 세계란 그리드 평면 위에 그려질 수 있는 세계이다. 수직 수평으로 정렬된 평행선이 나열된 그 평면 위에서 세계는 숫자로, 그래프로, 표로 환원되고, 계산되고, 분석되고, 예측할 수 있게 된다. 확신 없는 목소리, 말로 붙잡기 어려운 느낌, 혼란과 변칙은 이 그리드 밖으로 밀려나 소통되지 못한 채 개인의 내부에 머문다.
‘휘발성’은 물질이 액체에서 기체로 빠르게 변하는 성질로, 순간 존재하다 금세 사라지는 기체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 단어는 물질의 상태뿐 아니라 사람의 성미나 상황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며, 이 경우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 또한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태와 작법의 휘발성을 찾기 위해, 평면 이미지를 입체로 전환하고, 원을 조각 내고, 규칙을 번복하고 다시 설정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스프레이로 물감을 분사하고, 이미지가 있던 자리에 자국을 남긴 뒤, 그것을 다른 위치로 옮겨 본다.
나는 그리드 평면에서 밀려난, 혹은 휘발한 것들을 되찾고자 한다. 색면을 가르는 수직과 수평선, 교차점에 맺힌 원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잘라내어 공간으로 끄집어낸다. 부서진 조각을 뒤틀고, 겹치고, 배열하고, 연결하는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하나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미리 계획하거나 완결할 수 없는 형태를 생성해 낸다. 이렇게 태어난 형상은 가능하지만 필연적이지 않은 세계, 셈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세계의 모습과 닮아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