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X5SECRETS
‘소녀’들은 글로만 쓸 수 있는 내용을 왜 형형색색 펜과 반짝이는 장식으로 꾸밀까? 이 질문은 곧 회화의 근본적 물음, 즉 “왜 그리는가”와 맞닿는다. 감각적인 것은 언어가 닿지 못하는 무언가를 드러내는가? 아니, 그 이전에 왜 ‘장식’과 ‘꾸밈’이라는 말이 ‘소녀’에게 쉽게 달라붙는지를 먼저 묻게 된다. 그리고 나서야, 기존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소녀’들의 정체성이 ‘장식’과 ‘꾸밈’을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이어리를 쓰는 ‘소녀’는 달력의 35칸을 문자와 이미지로 재구성하며, 그 속에 ‘비밀스러운’ 정서를 기입한다. 달력이 연·월·일이라는 단위로 시간을 나누는 공통의 체계라면, 다이어리의 저자는 그 체계를 수정하며 개인적 경험, 감정, 소망, 계획으로 채워진 사적인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 이 ‘사적인’ 페이지 위에서 사회적 약호인 문자 기호의 ‘보편성’은 저자의 독특한 취향에 의해 흔들리고 지워진다. 비로소 ‘소녀’가 펼친 한 개인의 세계가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은 다이어리라는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이기에 가능하다. 나는 바로 이 ‘소녀의 태도’ ― 권위를 전복하기보다 천연덕스럽게 무시하고, 감정과 감각을 순전하게 유희하며 세계의 질서를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태도 ― 를 회화에 드러내고자 다이어리를 그린다.
⟨7X5SECRETS⟩(2019)은 다이어리의 형식을 빌려, 그리드, 문자, 색면, 장식, 기호, 이미지 등으로 구성한 회화 작업이다. 그림의 전체 구조를 만드는 가로 7열, 세로 5행의 그리드는 사고를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도표의 일종인 달력의 형식이자, 동시에 모더니즘 추상회화의 그리드를 환기한다. 이성적 사고체계를 나타내는 그리드 평면에 장식, 꾸밈, 노동 집약적 반복, 색채의 강조 등 공예적·장식적 레이어를 더함으로써, 주로 남성적 권위 아래 전개된 모더니즘 추상의 질서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소녀’는 사회적 질서에 진입하기 전, 아직 규정되지 않은 존재다. 도래하지 않은 정체성을 실험하며, 그것을 갈망하기도 하고 동시에 거부하기도 한다. 사회적 체계가 만들어내는 위계와 구분, 권위와 질서를 눈치채지만 무시하거나 무관심할 수 있다. 작은 세계의 주인인 ‘소녀’는 그녀의 공간에 새어 들어온 외부의 파편에 엄청난 강도로 쾌락, 기쁨, 슬픔, 절망을 느낀다. 이 세계는 고립되어 있을지라도, 그녀의 상상은 한계 없이 자유롭고 유희적이며 진지하다. ⟨7X5SECRETS⟩는 ‘소녀의 태도’를 기억하고 상상하며 회화에 접근한다. 그녀는 회화의 역사에서 시도된 다양한 방식 중 어느 것도 절대적이라 믿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유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 이미지, 공예, 건축 장식, 색면 추상, 환영 기법, 사진 앱의 필터효과, 포토샾의 레이어 효과, 3D방식으로 제작한 이미지는 한 화면에 동시에 놓일 수 있다. 회화는 미리 계획되거나 개념으로 도출해낸 이미지가 아닌 감각과 욕망에 이끌려 자유롭게 새로운 요소를 보태고 이전의 상태를 변화시켜 나가는 무한한 형식일 것이다.
다양한 요소를 중첩하고 덧칠과 수정을 거듭한 다이어리는 한 개인의 혼돈의 세계를 담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읽히지 않는 절반만 열려 있는 타자의 텍스트이다. 타인과 소통할 때 몰이해에 부딪히듯, 반투명하게 인지된다는 점은 회화가 관객 앞에 나설 때 갖게 되는 불가피한 조건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언어적 의미 전달이 불명료하다는 점이 결코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불충분하게 만들지 아니다. 오히려 언어적, 이성적으로 잘 읽히지 않는 대상은 그것이 전달하는 감각을 더 민감하고, 풍부하게 느끼도록 이끌 수 있다. 다이어리라는 개인의 내밀한 질서를 구축해가는 페이지를 그리며, 관객이 이 그림을 더 명료하게 이해하기 보다는 더 민감하게 느끼기를 바란다. 어떤 대상을 쉴 새 없이 바라보고 감각하는 것은 곧 회화에 다가가는, 회화가 비추는 타인의 내면에 다가가는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