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하는 원형: 감각과 비이성의 회화적 셀(Cell)
현대 수학과 과학에서 원형은 완전함과 질서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물리학에서는 행성의 궤도나 인공위성의 회전 궤도를 계산할 때, 원형이 예측 가능하고 반복 가능한 법칙을 시각적으로 모델링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컴퓨터 그래픽이나 데이터 시각화에서 원형 패턴은 균형과 대칭의 기본 단위로 활용되며, 시계의 시침처럼 일상에서도 원형은 질서와 예측 가능성을 구현하는 핵심 요소다. 그러나 이러한 원형은 복잡하고 불규칙한 변동이나 우연적 요소들을 ‘잡음’이나 ‘예외’로 간주하여 단순화하고 제거하는 방식을 통해, 질서 있는 틀 안으로 포섭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즉, 비선형적이고 변동적인 현실을 이상적인 원형 모델로 축소하면서, 그 밖의 다양성과 불확실성을 배제하는 질서의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최혜경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개된다. 그의 회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원형은 단지 조형적 선택이 아니라, 세계를 감각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사유이다. 즉 구체는 완전하고도 닫힌 구조가 아니라, 흔들리고 열린 표면이며, 경계가 내부로 접히고 외부로 반전되는 구조적 리듬을 가진다. 이 형상은 중심을 안정시키기보다는 흐트러뜨리고, 안팎을 교차시키며, 세계를 고정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유동하는 감각의 장으로 재구성된다.
1. 기하학과 감각 사이에서
기하학은 최혜경의 회화에서 질서의 언어이기보다 감각의 도구로 작용한다. 직선과 곡선, 형태를 비춰 옮기는 시도와 색채를 흩뿌리는 움직임, 회전과 접힘은 조형의 문법을 따르되 정합된 구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면의 밀도, 결, 속도, 리듬과 같은 비언어적인 감각 요소들이 전면화되며, 평면 위에 시각과 촉각이 교차하는 다층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곡선으로 엮인 구조는 흐름의 단위가 되며, 색은 농도와 방향에 따라 밀도와 압력을 더하며 시선을 움직이게 한다.
작가는 회화의 핵심을 이러한 형상과 색이 가진 원초적 감각에 둔다. 그것은 언어나 개념이 개입하기 이전의 감각이며,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가장 직접적인 층위이다. 이러한 감각은 반드시 캔버스 위에서만 작동할 필요도 없다. 회화의 문법은 그것이 전개되는 물질적 기반에 얽매이지 않으며, 감각의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모든 매체와 상황에서 유효하게 기능한다. 그녀의 작업에서 회화는 평면을 넘어서고, 구조물에 스며들며, 공간에 떠 있는 색과 형상의 리듬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회화적 접근은 자율성과 완결성을 전제하는 이성적 형식 체계에 대한 회의 속에서 비롯된다. 이성과 질서가 자본이나 권위와 결합될 때, 세계를 이해하고 감각하는 방식은 특정한 방향으로만 조율되며, 그 바깥의 비이성적 사유나 감각의 영역은 배제되거나 침묵하게 된다. 최혜경은 이러한 제한을 넘어서기 위해 회화를 매개로 이성과 비이성, 구조와 흔들림이 공존하는 공간을 구성하고자 한다.
2. 미시적 존재, 흐름으로서의 회화
이러한 회화적 사유는 보다 최근 작업인 〈아이테르 Aether〉 시리즈(2022-2024), 〈마이크로그래피아 Micrographia〉(2024), 그리고 개인전 《추상기계(B)》(2025)에 출품한 〈우울한 오류〉 시리즈(2025)와 같은 작업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먼저 〈아이테르〉 시리즈는 세계를 채우는 비가시적 감각, 존재 간의 흐름, 정서의 전도체로서의 공간을 상상한다. 과학적으로는 폐기된 개념인 ‘아이테르(Aether)’는 여기서 물리적 실체가 아닌 감각과 에너지의 메타포로 재해석된다. 전 시리즈에 걸쳐 나타나는 감정, 정서, 에너지와 같은 비물질적 흐름은 그의 회화 속에서 반복적 형상과 원형 구조로 나타나며, 그것은 경계가 허물어진 내부와 외부가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유동적 장면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아이테르〉 시리즈는 고대적 이상으로서의 원형이 아닌 감각의 흐름과 관계 맺음을 드러내는 ‘열린 원형’으로서, 지속되는 시리즈 속에서 감각 공간의 변화와 확장을 탐구한다.
이후 개인전 《마이크로그래피아》(2024)와 《추상기계(B)》에서는 이러한 흐름과 원형의 감각적 특성이 세포 단위와 연산 시스템으로 확장되며, 작가는 미시적 생명체와 알고리즘의 상호작용 속에서 감각과 이성, 구조와 불완전성이 교차하는 복합적 형상을 탐색한다.〈마이크로그래피아〉는 약물이 인체에 들어와 작용하고 배출되는 일련의 흐름을 따라가며, 세포와 입자의 세계를 상상적 내러티브로 풀어낸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홀론’은 내부와 외부가 자유롭게 전환될 수 있는 구체의 형상으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 경계가 불분명한 생명적 단위이며, 다른 존재와 접촉하고 변화하며 유지되는 유기체적 구조이다.
《추상기계(B)》는 이러한 ‘홀론’의 외연을 더욱 기하학적이고 연산적인 방향으로 확장한 결과물이다. 특히 〈우울한 오류〉에서 작가는 구면기하학을 기반으로 한 곡면 형상을 함수와 알고리즘을 통해 재구성하며, 회화와 콜라주를 통해 그 연산 결과를 물질화한다. 이 과정에서 수식과 시스템은 단순히 계산의 도구가 아니라 감각의 문법을 변형시키는 수행적 기제로 작동한다. 즉, 이성이 매개한 연산 시스템은 감각적 질료와 충돌하며, 오류, 불일치와 과잉이라는 감정적 요소들이 개입된 복합적 지형을 형성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연산이 도달한 ‘정확성’보다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예기치 못한 ‘변칙적’ 결과물을 회화적 이미지로 전환한다. 그에게 있어 회화는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연산이 감각에 닿는 지점, 혹은 그것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한 오류〉는 완결된 형상이 아니라 미해결의 상태, 불균질한 충돌의 잔여물로 구성된 감각의 지형도이자, 추상화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
이러한 작업에서 회화는 대상의 모양을 옮겨 그리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 정서, 에너지 같은 비가시적 흐름이 머물고 흘러가는 하나의 살아 있는 구조다. 회화는 고정된 완성품이 아니라 감각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순간들의 집합이며, 그것은 시각의 대상이라기보다 감각이 작동하는 하나의 구조적 조건이다.
3. 연약함의 감각과 회화적 윤리
2020년 개최된 개인전 《이온 러브》는 이 같은 감각적 구조를 물성적으로 풀어냈다. 망사 천 위에 물감을 안착시키고, 그것을 피부처럼 설치함으로써 회화는 두께와 밀도, 진동을 지닌 감각의 막으로 나타난다. 이 회화는 단단한 프레임에 고정되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고, 시선에 따라 반응하며, 공간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피부처럼 열린 표면이며, 타자와의 접촉을 허용하는 다공성의 장이다.
이때 회화는 연약함의 형상이 된다. 쉽게 찢기고 감염될 수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외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구조. 감각과 접촉은 이러한 연약함 속에서 발생하며, 회화는 그 연약함을 유지한 채 타자를 맞이하고, 감정을 교차시키며, 에너지를 스며들게 만든다. 회화는 자신을 밀폐시키지 않고, 오히려 외부와의 진동을 허용함으로써 살아 있는 감각의 구조가 된다.
여기서 연약함은 수동성이나 소극성이 아니다. 그것은 능동적인 개방의 상태이며, 감각적 관계를 맺기 위한 조건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회화는 말로 다 표현될 수 없는 미세한 정서와 감정의 흔들림, 균열, 떨림을 시각화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감각은 때로는 애정이나 우정, 혹은 사랑과도 가까운 정동의 형태로 전달된다. 감각이 교차하고, 진동하며, 스며드는 회화적 순간. 그것은 감정을 주고받는 친밀한 경험과도 연결된다.
또한 이러한 연약함은 감정의 통로이자 타자성과의 접점일 뿐 아니라, 이성의 논리로 포섭되지 않는 비이성의 영역을 감싸안는 ‘열린 원형’과도 같다. 이성이 중심이 된 질서 아래에서 비이성은 종종 무질서하거나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최혜경의 회화는 연약한 표면을 통해 그 비이성의 리듬을 수용한다. 비논리적이거나 비결정적인 흐름, 실수와 오류, 감정과 충동은 그의 회화에서 지워지거나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로 형상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회화는 연약함 속에서 자신을 열어두고, 이성과 비이성 사이를 가로지르며, 양자를 모두 감각의 층위에서 재조정할 수 있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장치로 작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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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 다시 원이다. 중심을 벗어나고 또다시 재형성되는 원형의 리듬처럼, 최혜경의 회화는 한 점에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전환하는 감각의 장이다. 작가에게 원형은 단순히 완결된 형상이 아니라 유동하고 진동하는 생성의 형상이며, 계속 살아 움직이며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다. 이에 회화는 더 이상 캔버스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의 구성 방식을 다시 질문하는 감각의 언어로 작동한다.
최혜경의 회화는 결국 ‘그리는 것’이라기보다 ‘감각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고 그 탐구는 완성된 구체가 아니라 진동하고 있는 구조, 무언가 생성 중인 표면, 즉 공명하고 있는 셀(cell)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다시 말해 이 셀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확장과 변형이 가능한 회화의 살아있는 기본 단위인 셈이다. 반복되는 원형의 흐름 속에서 셀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다시 짜이며, 그 운동이 곧 회화를 살아 있게 만든다.
시각예술을 비롯한 동시대 문화 속에서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정치성과 이면의 서사를 탐구한다. 최근에는 기술사회의 전환 속에서 드러나는 게임, 디지털 내러티브, 스크린 환경 등 새로운 매체적 조건을 비평적으로 살피며, 이로부터 생성되는 동시대적 감각의 변화를 사유하고자 한다.